거제출신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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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한자 梁明
성별
생년월일 1902-03-20
사망년월일 미상
본적 사등면 사등리817
운동계열 해외항일
포상년도 2007
훈격 애족장
공훈록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 공훈록)

양명은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쳤으며, 1919년 무렵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1924년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혁명』발행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8월 귀국하여 같은 달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고 12월 조선공산당 상해부(上海部) 상해야체이카 위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표방하는 레닌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1928년 초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3월 무렵 조선공산당 정치부 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양명은 코민테른 제6차 대회 파견 대표로 선정되어 9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공 지부 승인 취소 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을 작성하였고 1929년 북경에서 조공 ml파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했다. 1929년 5월 길림에서 개최된 조공 재조직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중국 관내에서 한위건(韓偉健)과 조공의 선전활동을 전담했다. 1930년 3월 천진(天津)에서 고경흠(高景欽)과 일본 동경(東京)에 조선공산당 선전활동의 기지를 건립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양명은 1931년경 소련으로 망명하였으며. 12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구원이 되었다. 1935년 9월 19일 러시아 형법에 의해 ‘조선공산당 내 반당그룹의 공범 활동’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8년의 유형(流刑)을 선고 받았으며, 1956년 9월 22일 소련 최고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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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복지국 사회복지과  

최종수정일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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