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출신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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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기
한자 辛容祺
성별
생년월일 1901-06-01
사망년월일 1948-05-14
본적 하청면 하청리5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8
훈격 건국포장
공훈록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 공훈록)

신용기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어려서 중국 만주 북간도에서 한문을 배웠다.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북간도 국자가 길림성립 사범학교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해 중국대학, 남경 민국대학, 상해 법률전문학교, 동경 메이지대학을 각각 중퇴하였다. 1922년 4월 소련 이르쿠츠크에서 조국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하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이르쿠츠크 군정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가 1923년 3, 4월경 꼬르뷰로(코민테른 극동총국 산하 高麗局) 국내 공작원이 되어 서울에 잠입하였다. 4월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신용기는 김재봉(金在鳳)·김찬(金燦)·신백우·윤덕병(尹德炳)·원우관(元友觀)·이영(李英) 등과 비밀결사 조직을 토의하였다. 6월경 서울청년회계를 제외한 화요회와 북풍회(北風會)의 간부들과 경운동 김찬의 집에 모여서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었다. 7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후기 청년뷰로와 그 경과를 이동휘(李東輝)·정재달(鄭在達)·한명서(韓明瑞)에게 보고하고 다시 돌아왔다. 1923년 여름, 이호(李浩)·민태흥(閔泰興)과 함께 토요회(土曜會)를 조직하였다. 9월, 여자고학생상조회(1922년 4월 1일 결성) 회장 정종명(鄭鍾鳴)과 같이 경남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하던 중, 12일 김해군에서 종로경찰서 출장원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구류 15일을 받았다.

1924년 2월 10일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창립총회에서 ‘조선청년총동맹’조직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3월, 고려공청 책임비서직에서 사보타지 혐의로 해임되었다. 4월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개최된 ‘13인회’에 참석했고, 7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에 참여했다. 11월 북풍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6월 조공의 코민테른 가입 문제에 대한 북풍회의 견해를 제출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출발하여 10월경 도착하였다. 11월 당내에서 북풍회의 종파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1926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북풍회 공산주의자그룹의 연락책임자로 일했다. 5월경,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이제(李濟)의 집에서 박준호(朴俊浩, 蔡그리고리)·정운해(鄭雲海)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북풍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경남 마산의 사각동맹(四角同盟) 회원 김상주(金尙珠) 등 4명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동지의 일치단결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신용기는 검찰에 기소되었으나,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그러나 1928년 체포되어 1929년 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9월 28일 출옥하였다.

1938년 6월경 의사면허를 얻어 경상남도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며 1941년 1월 30일 폐업하였다. 해방 후 잡지사를 경영했으며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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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복지국 사회복지과  

최종수정일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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