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덕면 거림리

둔덕면 거림리

  • 둔덕면(屯德面)의 중앙의 위치하고 마장(馬場), 거림(巨林), 농막(農幕)의 3개(個) 행정리(行政里)로 영조(英祖) 45年(1769) 거림치방(巨林峙坊)이며, 고려(高麗) 성종(成宗) 14年(995) 기성현지(岐城縣址)로 토성을 쌓고 마을 주변과 북쪽 당산등(堂山嶝)과 청룡등(靑龍嶝)에 울창한 숲을 육림하였으니 거림치(巨林峙)라 하였다.
거림(巨林)마을

기성현(岐城縣)의 옛터로 토성(土城)안에서 고려유물(高麗遺物)이 출토되고 마을을 수호하는 숲이 울창하여 거림치(巨林峙)라 하였다.

농막(農幕)마을

의종왕(毅宗王)이 둔전(屯田)을 두고 농사를 짓게하였으며 윗마을에 농막터의 촌락이 있으니 이를 망하터라 한다.

마장(馬場)마을

의종왕(毅宗王)이 거제도(巨濟島)로 쫓겨와서 감목관(監牧官)을 두고 호위군의 군마(軍馬)를 방목하였다가 계류시켰던 마을이며 1945年 광복후 까지도 혼례의 차마(車馬)로 7두(頭)를 사양하였다.

갓 등

청룡등(靑龍嶝) 북쪽끝에 갓모양의 등성이가 있다.

기와집 몰랑이

마장(馬場) 마을 윗 밭들에 기성현(岐城縣)때 아전(衙前)들의 기와집 마을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토기와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기성현지(岐城縣址)

고려 성종(高麗 成宗) 2年(983) 진주목(晋州牧)의 영현(領縣)이었다가 동(同) 14年(995) 산남도(山南道)라 하고 관하에 기성현(岐城縣)을 두었으며 거림리(巨林里) 274의 2번지(番地) 밭을 중심으로 토성(土城)을 쌓았으므로 의종(毅宗) 24年(1170) 8月 30日 정중부(鄭仲夫)의 반란으로 10月 2日 거제도(巨濟島)의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왔으니 1996年 5月 13日 문화재전문위원(文化財專門委員)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박물관장(博物館長) 심봉근(沈奉瑾)이 [상사리 8월 4일(裳四里 八月四日)]이 표기(表記)된 기와를 발굴하여 거제(巨濟)의 독로군(瀆盧國)과 상군(裳郡)을 조명(照明)하게 되었다.

두덕들

거림(巨林)의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논들로 의종왕(毅宗王)을 따라온 관원의 마을과 객사가 있었다함.

마하(馬下)터

의종왕이 고관들이 하마하던 정거장이 있었다.

망 골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밑에 있는 골짜기의 등성에서 정중부(鄭仲夫)의 반란군이 추격해 오는지 망을 보았다는 곳이다.

못 골

마장(馬場)과 시목(枾木)의 경계에 흐르는 계곡에 옛날부터 못이 있었으며 일제말기에 포강을 만들었다.

마고(麻姑)덜겅

의종(毅宗) 24年(1170)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을 쌓을때 옛날 전설의 신선 마고(麻姑)할미가 치마에 돌을 가져와 성을 쌓고 나머지 돌을 버렸다는 너설이 방언으로 덜겅이라 하며 그 규모는 1ha정도이다.

뱀등 개구리등과 독수리바위

마장(馬場)의 윗골 우두봉(牛頭峯)의 줄기가 뱀의 형상으로 내려왔고, 그 밑에 개구리 같은 작은 등성이를 잡으려는 것을 서남쪽 우두봉(牛頭峯) 큰줄기에 독수리 바위가 개구리를 보호하고 있는 이름이다.

빈정승묘(賓政丞墓)

농막(農幕)의 망아터 뒷산 중허리에 큰 묘가 있는데 비석(碑石)은 없고 옛날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와서 죽은 빈정승(賓政丞)의 묘라 전하며 사등면(沙等面)에는 빈씨(賓氏)가 현주하고 있다.

서당곡(書堂谷)

마장(馬場)마을 서쪽 골짜기에 고려시대 부터 서당(書堂)이 있었다.

새양골

유학(儒學)은 신라(新羅) 진덕왕(眞德王) 2年(648)에 김춘추(金春秋)가 전수하였고, 고려 현종(高麗顯宗) 11年(1020) 신라(新羅)의 최치원(崔致遠)과 동 13년(同 13年:1022) 설총(薛聰)에 배향했느니 의종(毅宗)이 쫓겨와서 학교(學校)를 설립하였다는 거림(巨林)마을 위쪽을 방언으로 새양골이라 한다.

안치봉(安置峯)

농막(農幕)의 남쪽에 있는 산기슭에다 의종왕(毅宗王)의대비(大妃)를 살게한 대비장(大妃莊)이 있었다.

여관곡(如關谷)

농막(農幕)과 하둔(下屯)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에 기성(岐城)고을의 세금(稅金)을 수납(收納)하던 기관이 있었다.

역둔답(驛屯沓)

마장(馬場)의 위쪽들판에 국마(國馬)를 기르는 사람들의 농토가 있었다.

옥토(玉土)들

거림(巨林)마을앞 토심이 깊고 비옥(肥沃)한 논들로 소출이 많아 방언으로 옥터라하며 거제도(巨濟島)에서는 1둔덕(屯德), 2하청(河淸)이라 전래되고 있다.

우마장(牛馬場)

우두봉(牛頭峯)에서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에 이르는 양지바른 넓은 초원은 의종왕이 말을 방목하였으며 그 뒤에 소를 놓아 먹였으니 거제(巨濟)는 소섬, 제주(濟州)는 말섬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약초를 먹은 거제소를 제일이라고 평가되었다.

자주방(自主防)

여관곡(如關谷)에 의종왕(毅宗王)이 자체 방위를 위하여 군사를 주둔 시켰던 곳으로 자주방(自主防)이라 하였다.

제장군묘(諸將軍墓)

마장서당곡(馬場書堂谷)위에 뒤앞데기의 넓은 초원(草原)이 있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거제도의 첫 의병장(義兵將)으로 송정(松亭)과 다공(茶貢) 밀바대 싸움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7년간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의 녹권을 받은 수문장(守門將) 제 진(諸 璡)의 묘(墓)와 비석(碑石)이 있다.

제신암(祭神岩)과 제사곡(祭祀谷)

우두봉(牛頭峯) 꼭대기에 높이 30m의 큰 바위 굴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사두등(蛇頭嶝 일명:뱀등) 밑 골짜기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골짝마다 산답이 있다.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

고려 의종(高麗 毅宗) 24年(1170) 8月 30日 정중부(鄭仲夫)의 숭문주의 반란으로, 10月??峯) 중허리에 견내량(見乃梁 일명:전하도(殿下渡))을 내려보고 둘레 570m, 높이 5m의 산성(山城)을 쌓고 3년간 반란군의 추격이 있을까 감시하였으며 성내에는 천지(天池)가 있고 북측에는 제단이 있어 주민이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올린 기성(岐城)이라 하였다. 명종(明宗) 3年(1173) 8月 경주(慶州)의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왕의 복위를 꾀하다 정중부(鄭仲夫)가 보낸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함께 살해(殺害)를 당하니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이라 하였고 지방기념물(地方紀念物) 제11호(第11號)로 지정되고 성밑까지 임도(林道)가 개설되어 자동차로 등산하고 있다.

홈골보

둔덕천(屯德川)의시목(시木) 앞에서 보를 막아 농업용수를 1km정도 끌어오다 마장천(馬場川)이 깊게 파여 큰 나무에 홈을 파거나 널판지를 짜서 논물을 끌어 오는 도수로와 감시원을 상주시키는 외딴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교량과 도수로가 함께 가설되었다.

담당부서

  • 문화관광국 문화예술과  

최종수정일 :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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