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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사등"이란 명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사등면은 거제도의 서부 관문이자 한려수도 교통의 중심인 성포항이 있으며, 사암의 사양토질 농지인 밭이 면적의 47%로 거제시 평균인 35%에 비해 모래가 많다고 하여 사등면이라고 불렸다.

BC 4세기 삼한시대 변한의 12개 토후국 중 하나인 독로국으로 사등에 왕도를 정하였으며, 대리 뒷산에 천진제를 지내는 소도를 정하고 군장이 다스렸다.

사곡리

  • 사곡마을은 팔골의 북동쪽 갯마을로 앞바다가 얕아 모래가 많으므로 모래실이라 한자로 사곡이 되었다.
  • 두동마을은 본래 두둥방이였으나 밭이 많아 팔골이라 하였는데 그 이후 두동마을로 불리어 졌다.

사등리

  • 성내마을은 신라 신문왕 5년 금녕도호부 관하에 해상방어를 위해 사등성을 쌓았으며 이성안에 살고 있는 마을이다.
  • 언양마을은 사등리의 서남쪽 개금치 밑 양지바르고 앞에는 큰 사등평야가 펼쳐있으니 언양이라 하였다.
  • 대리마을은 사등성의 서쪽 망치산 자락에 있어서 본래 건너물이라 하였으나 성을 쌓은 후 군합정을 지어 수군을 훈련시켰고 임진왜란 후 창녕조씨가 들어와 경원제와 정종사를 세워 큰 마을이 되었으니 대리라 불리어 졌다.
  • 금포마을은 본 마을이 망산 아래 꽃바등 위쪽에 있고, 등 너머 마을이 앞 등 마을이다. 이 두 동네가 금포마을이다. 이 마을을 금포라 한 것은 등 너머에 있는 개(浦)가 금개다. 예전에 이곳에서 금개를 채취하였는데 그 후부터 금 팠던 금 굴이 있는 이곳을 금개라 불렀다. 금개를 금생(金生)개 또는 금굴개라 하기도 하던 것을 한문으로 옮겨서 금포(金浦)라 한다.

성포리

  • 항도마을은 성포의 동쪽에 있는 섬인데 민물때는 섬이고 썰물때는 걸어다니는 장구 모양의 목이 있어 목섬이라 하였으나 이 목을 매립하여 멸치 어막을 만들었고 지금은 조선소가 있는 마을로 1968년 신설되었다.
  • 성포마을은 본래 내사리에 속하는 북쪽 갯가에 선창의 포구가 있었는데 부산과 마산 통영의 항로가 발전되어 항구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사등성과 포고의 뜻으로 성포라 하였고 1936년 사등면사무소를 지석리에서 옮겼다.
  • 사근마을은 옛날의 내사리인 윗사근과 바다의 아랫사근을 합친것으로 사등을 중심으로 사곡은 모래실의 모래골이고, 사등은 모래같은 사양토질이며 사근은 맑은 모래의 근원지라는 뜻에서 사근리라 불렷다.

지석리

  • 지석마을은 선사시대의 고인돌 무덤이 지석방의 서남쪽에 세개가 있었기에 지석이라 하였으며 1923년 처음으로 사등면사무소를 사등리에 둔 후에 1919년 지석마을에 옮겼다가 1936년 성포로 옮겼다.
  • 장좌마을은 지석마을 남동쪽 골짜기에 윗장자골에 윗장자골과 아래 장자골의 두 촌락이 있는데 가파르고 좁고 깊숙하여 옛날 장자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때 장군이었던 수성 빈씨가 입주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라 장좌라 하였다고 한다.

청곡리

  • 청곡마을은 고인돌이 있는 지석방에 속하고 있었으나 분리되면서 청초산 밑이고 구석촌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곡이라 불린다.
  • 청포마을은 본래 서갈곶이 또는 부평이라 하였는데 부평산의 서쪽이고 부평산 및 갯가마을이라 청포라 불린다.
  • 들막마을은 갈고지 등 넘어에 있는 마을이다. 청포마을 앞의 들을 지나 예전에 고기잡던 어장막이 있었던 곳이다. 들에 어장막이 있었다고 들막이라 하고 이 들을 들막 들이라 한다.

오량리

  • 오량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지다고 해서 본래 지명은 오양(烏壤)이라 했다. 흙덩이 양(壤)자가 어질량(良)자로 바뀌었는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 신계 마을은 오양성의 서북쪽 오량천을 건너 남향으로 따뜻한 새마을이 형성되어 신계라 불려졌다.

덕호리

  • 견내량 마을의 원래 이름은 진두(津頭)라 하였다. 섬에서 육지로 건너다니던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에 나루터를 진두라 표기했다. 그 후 1170년 고려 18대 의종왕이 정중부 반란에 쫓겨나 거제로 피난오면서 퉁구미 배로 이 해협을 건넜다고 전하도(殿下渡)라 했다. 전하도란 말이 변음되어 견하도(見下渡)라 하였고, 그 뒤 견내량이 되었다.
  • 신촌마을은 통영과 거제 시내버스의 정류장 설치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새마을이 형성되어 신촌이라 불렸다.
  • 광리마을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려수도의 관문에 토성을 쌓아 '왜성'이라 지칭하였는데 넓은 등성이 들판을 '번득'이라 하여 광리 마을이 되었다.

창호리

  • 창외마을은 가조도의 남단 성포항과 마주보는 나룻터가 있어 진두라 하였으며 섬의 중심에서 밖이라 하여 창외라 하였다.
  • 군령포 마을은 가조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한려수도의 깊숙한 포구로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이 머물면서 군령을 받았다는 갯마을이라 하여 군령포(軍令浦)라 한다.
  • 신전마을은 가조도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초원이 풍부하여 섶밭이라 하였는데 이후 신전이라 불렀다.
  • 창촌마을은 가조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옛날 가조도 목장이 있을때에 창고가 있던 곳으로 창촌이라 하였다.
  • 계도마을은 옥녀봉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에 닭 모양을 한 바위섬이 있다. 이 섬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계도(鷄島)라 한다.
  • 실전마을은 가조도의 중심 마을로 옥녀봉 남쪽에 위치하여 분래 실밭개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갱이 바다의 어업기지였으며 가조출장소가 있었던 마을이다. 이 지역은 전답이 많기 때문에 농업을 주업으로 한다.
  • 유교마을은 가조도의 북동단에 위치하여 대구어의 풍어로 어린이도 엽전을 가지고 다니는 잘사는 갯마을이고 옛날 아랫마을과의 사이에 쇳다리를 놓았다 하여 놋다리라 전래되어 유교라 하였다.
  • 신교마을은 원래는 유교(놋다리 : 鍮橋)마을이었는데 유교에서 놋다리 북쪽 아래 마을을 분리하면서 새로운 놋다리 마을이라 하여 신교(新橋)라 했다.

담당부서

  • 사등면   

최종수정일 : 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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