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목면 송진포리

장목면 송진포리

  •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때 하청면(河淸面) 장목방(長木坊)에 속하였는데 이는 장목만(長木灣)의 북편에 위치한 갯마을이었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송진리(松眞里)가 되었다가 동(同) 32年(1895) 5月 26日 칙령 제98호(勅令 第98號)로 신촌(新村)과 궁농리(宮農里)로 나뉘었는데 융희(隆熙) 3年(1909) 6月 25日 칙령 제30호(勅令 第30號)로 장목면(長木面) 신설에 따라 속하였고 1915年 6月 1日 도령 제20호 법정동리령(道令 第20號 法定洞里令)으로 송진포리(松眞浦里)로 통합되었으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송진(松眞), 신촌(新村), 궁농(宮農), 간곡(間谷)의 4구(區)가 되어 1961年 10月 1日 거제군조례 제4호(巨濟郡條例 第4號)로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송진(松眞)마을

본래 소징개, 소비포(所非浦), 송진포라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적송(赤松)을 참솔이라 하여 송진포(松眞浦)라 하였으며 남부면(南部面) 송미포(松未浦)는 참솔이 아닌 흑송(黑松) 또는 해송(海松)이 울창하여 풍수지리설(風水地里說)에 의한 상대성의 지명(地名)이며 해송(海松)은 거제시목(巨濟市木)으로 지정되었다.

신촌(新村)마을

광무(光武) 8년(1904) 노일전쟁(露日戰爭)으로 만주(滿洲)의 요동반도(療東半島)에서 대승(大勝)한 일본군(日本軍)은 러시아(露西亞)의 '발틱'함대(艦隊)가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대한해협(大韓海峽)으로 항진한다는 정보에 따라 1905年 2月 22日 송진포(松眞浦)에 일본해군 본거지(日本海軍 本據地)를 둠에 따라 강제로 이주시킨 남쪽 등넘어 신촌마을이다.

궁농(宮農)마을

본래 궁노실 또는 신궁촌(神宮村)이라 하였으며 송진포의 남쪽 고개너머에 있는 농어촌(農漁村)으로 바닷가에 억센파도로 둑이 생겼으니 방풍림을 조성하였고 안에는 연못이 생겨 갈대 밭이 무성하니 궁궐 같다하여 궁농(宮農)이라 하였다.

간곡(間谷)마을

송진포 동쪽 너머에 깊은 골짜기 아래 간곡만(間谷灣)의 길고 넓은 몽돌 해수욕장 중심부 안에 있는 새앳골로 간곡(間谷)이라 하였다.

가맷골등

송진포 서북쪽에 지형이 가마모양의 등성이 밑에 골짜기가 있다.

간청개바위

송진포 남쪽에 일본인 관청이 있던 곳에 넓은 바위가 있다.

개 들

궁농 갈대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개들이라 하였다.

개여시 바위

간곡 뒷산에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는 바위가 있다.

고려장터

간곡 북쪽 등성이에 고려장의 터가 있다.

굴바위

송진포 동쪽 굴바우들에 굴이 있는 바위다.

굿한바위

간곡 뒷산 개여시바위 옆에 굿을 하였다는 바위다.

금 굴

송진포 북동쪽 도둑놈굴 밑에 왜정때 금광굴이 있었다.

깨작몰

궁농 동쪽 갯가에 있는 갯촌이다.

깨처논골

서당골 북쪽에 고사리 모양의 깨첩나물이 많았다.

노일전쟁기념비(露日戰爭紀念碑)

광무 8年(1904) 노일전쟁이 발발하여 청(淸)나라의 요동반도(療東半島)에서 대승한 일본군은 노서아의 '발틱'함대가 아프리카 남단을 둘러 대한해협을 항진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는 첩보를 입수한 다음해 1905年 2月 22日 송진포(松眞浦)를 강점하여 일본해군본거지(日本海軍本據地)를 창설하고 기다리다가 5月 27日 동경평팔랑원수(東卿平八郞元帥)가 격전 대승하여 종전되었고 7月 29日 '카스타태프트'의 미일조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韓國)을 독점 지배하고 사할린 남부와 요동반도의 여순(旅順), 대련(大連)의 영유권을 가졌으며 1931年 5月 27日 일본해군기념일을 제정하고 송진포에 전승기념비를 세웠는데 광복후 주민이 철거하였고 이를 시청(市廳)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대 골

궁농과 간곡사이 골짜기에 대나무가 많았다.

도국놈굴

송진포 북동쪽에 도적이 숨어 살았다는 굴이다.

돌밭걸

궁농에 돌이 많은 밭이 있는 곳이다.

뒷 골

송진포 뒤에 있는 골짜기다.

등밑마을

신촌 남쪽의 갯가에 있는 마을이다.

두꺼비 바위

송진포 동쪽 굴바위와 범바위 사이에 있는 바위다.

말바위

굴바위 위에 말모양의 바위가 있다.

망봉산(望峯山)

궁농 동쪽 땅끝에 높이 182m의 산으로 봉우리에 노일전쟁때 초소를 두고 망을 보았다 한다.

메가릿개

송진포 서쪽 아랫몰 서쪽의 바다에서 메가리와 전갱이를 많이 잡았다 한다.

먹바위

신촌 남쪽등밑 남쪽 바닷가에 검은 바위가 있다.

문진메골

신촌에 작은 들쥐의 문쥐가 줄을 지어 다니던 골짜기다.

붕기미개

궁농의 해변가에 붕새가 살았다 한다.

삼밭골

송진포에 삼밭이 많았고 밑에는 삼밭골 논이 있다.

산짓골

송진포 동쪽 큰골 서쪽에 동짓달 보름날 당산제를 지냈다.

새배논골등

송진포 서북쪽 가맷골 서북쪽에 초지가 좋아 방목하였으며 북쪽등성이 높이 88.8m에 삼각점이 있다.

서당골

송진포 북동쪽에 서당이 있었던 촌락이다.

소비포진(所非浦鎭)

인조(仁祖) 원년(元年:1623) 구영등진(舊永登鎭)을 둔덕면 영등(屯德面 永登)으로 옮겼다가 영조(英祖) 26年(1750) 소비포(所非浦)로 옮겼는데 동(同) 32年(1756) 다시 둔덕면 영등(屯德面 永登)으로 환원하였다.

속 등

송진포 동북쪽 진등속에 있는 등성이다.

송진고개

송진포에서 장목리 북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수리장마을

송진포 서쪽에 있는 갯마을이다.

신촌재

송진포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아랫미마을

송진포 서쪽 아래에 메가리와 전갱이가 많이 잡히는 갯촌이다.

안산들

송진포 동남쪽에 있는 앞산 등성이다.

애곡들

간곡의 한가운데 있는 들이다.

웃 몰

송진포 북쪽산을 등지고 있는 촌락이다.

오랑칼끝

송진포 서쪽 아랫미 끝에서 북쪽으로 돌면 오랑칼끝이 있다.

장 등

송진포 북쪽에 있는 길다란 등성이다.

제산골

송진포 동쪽 포독골 동북쪽의 골짜기다.

절 골

송진포 동쪽 골짜기에 절이 있고 밑에 들이 있다.

중간몰

송진포 아래미마을과 웃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진 등

송진포 동북쪽에 길다란 등성이가 있다.

큰 골

송진포 동쪽 제산골 북쪽에 큰 골짜기와 논들이 있다.

큰봉바위

송진포 동남쪽 안산에 큰봉우리와 바위가 있다.

도깨비집골

송진포 서쪽에 도깨비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포독골

송진포 동쪽 피밭골 동북쪽 골짜기 굴에 도적이 숨었다가 잡혔다.

피밭골

송진포 동쪽 절골 동북쪽에 피나무가 많은 골짜기다.

흰돌바위

신촌 남쪽 등밑 마을 앞에 흰색의 바위다.

담당부서

  • 문화관광국 문화예술과  

최종수정일 :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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