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현 고현동

구신현 고현동

  • 세종(世宗) 14年(1432) 거제현(巨濟縣)의 읍기(邑基)였으나 현종(顯宗) 5年(1664) 현아(縣衙)를 서부면(西部面)으로 옮긴 후 고현면(古縣面)이라 개칭(改稱)하였으며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개편(坊里改編)때 남문(南門), 서문방(西門坊)으로 분리(分離)되었다가 1915年 고현리(古縣里)로 법정(法定)하였다.
  • 고현리(古縣里)는 거제도(巨濟島)의 중심지역(中心地域)으로 발달(發達)하여 행정리(行政里)는 서문(西門) 1,2,3,4동(洞), 동문(東門), 남문(南門)1,2동(洞), 중앙(中央), 성내(城內), 성동(城東), 성림(城林), 신성(新城), 중곡(中谷) 등 13개(個)의 행정리(行政里)가 형성(形成)되었다.
서문(西門)마을

세종(世宗) 14年(1432)에 거제읍성(巨濟邑城)을 낙성(落成)하고 읍기(邑基)하였으나 삼성조선소(三星造船所)의 창립(創立)으로 서문(西門) 1,2,3,4동(洞)으로 분리(分離)되었다.

동문(東門)마을

선조(宣祖) 25年(1592)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거제성(巨濟城)의 망루(望樓)가 있던 곳으로 폐성후(廢城後) 마을이 형성(形成)되기 시작(始作)하였고 1944年 고현출장소(古縣出張所) 설치로 동문구(東門區)가 되었다.

남문(南門)마을

거제성(巨濟城)의 남문(南門)이 있었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일운면(一運面)으로 개칭(改稱)하고 1913年 처음 면사무소(面事務所)가 있었으나 1928年 1月 1日 지세포(知世浦)로 옮겼다.

중앙(中央)마을

거제읍성(巨濟邑城)이 였던 고현성(古縣城)의 중심부(中心部)이고 신현읍사무소(新縣邑事務所)가 있다.

성내(城內)마을

고현성(古縣城)의 상단(上段)이며 현(現) 거제시청(巨濟市廳)이 있으며 성(城)의 하단(下段)은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 설치로 없어졌고 상단 잔존(上段 殘存) 둘레 740m는 연차(年次)로 복원(復元)하고 있다.

성동(城東)마을

동문(東門)마을의 북(北)쪽 시내(市內)버스의 시발장(始發場)으로 거제도(巨濟島)의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요충지(要衝地)이고 고현천(古縣川) 건너 금곡촌(金谷村)이 있다.

성림(城林)마을

고현시장(古縣市場)이 있는 마을이고 옛날 방풍(防風)의 송림(松林)이 있었다.

신성(新城)마을

고현만(古縣灣) 매립지(埋立地)의 중심상가(中心商街)와 시외(市外)버스 정류장(停留場)이 생겨나 신성(新城)이라 하였다.

중곡(中谷)마을

본래(本來) 바닷가의 중통곡(中桶谷)으로 항구가 통모양으로 깊숙이 들어와 통영(統營)과 마산(馬山)의 여객선 기항지였으나 고현만(古縣灣) 매립으로 APT단지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현교(古縣橋)

본래 거제현(巨濟縣)의 큰내를 한내라 하였으니 지금도 1917년에 가설한 한내 다리라 부르고 있으나 고현천(古縣川)에 고현교(古縣橋)로 개칭하였다.

고현만(古縣灣)

본래 거제현(巨濟縣)터의 앞바다로 읍성(邑城)을 막아주는 바다이니 한해만(한海灣)이라 하였으나 1915년 법정동리령에 따라 바뀌어 졌다.

고현성(古縣城)

고려(高旅) 말엽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의 침범으로 거제현(巨濟縣)의 거제도민(巨濟島民)은 모두 거창(居昌)의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갔다가 조선세종(朝鮮稅宗) 4年(1422) 태평성세로 사등성(沙等城)에 돌아왔으나 성이 협소하여 고정부곡(古丁部曲)에다 거제읍성(巨濟邑城)을 왕명에 의하여 동왕 14년(1432)에 낙성하고 관아 40칸을 건립한 거제성(巨濟城)인데 현종(顯宗) 5年(1664) 고현면(古縣面)과 함께 고현성(古縣城)으로 개칭하였다.
선조(宣祖) 25年(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5月 7日 옥포대첩(玉浦大捷)에서 왜선(倭船) 26척(隻)을 격침당한 왜패잔병이 거제읍성(巨濟邑城)을 공격하여 5일후인 12일 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가 전사(戰死)하고 함락되고 현종(顯宗) 5年(1664) 폐성하고 관아(官衙)를 서부면(西部面)으로 옮기니 고현성(古縣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1950年 6.25 사변(事變)으로 11月 27日 UN군(軍)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 설치에 따라 성벽을 헐어 골재로 활용 둘레 2,045m에서 계룡산(鷄龍山) 밑에 남아있는 740m의 성벽과 성내 27,141㎡를 1979年 5月 9日 지방기념물(地方紀念物) 제46호(濟46護)로 지정하였고 허물어져 있는 성벽을 1993년부터 연차로 복원공사를 하고 있으니 이 성(城)은 본래 거제읍성(巨濟邑城)이었고 거제시청(巨濟市廳)이 자리하고 있으니 거제성(巨濟城)으로 환원해야 한다.

고현장(古縣場)

본래 거제(巨濟)에서 아주(鵝洲), 읍내(邑內), 고현(古縣), 하청(下淸)의 네개 시장이 있었는데 주로 우시장(牛市場)이고 농공산품의 봇짐장수가 많았으며, 특히 고현시장(古縣市場)을 중심으로 매순(每旬) 5일과 10일에 수많은 상인과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금곡(金谷)마을

계룡산(鷄龍山)과 독봉산(獨峯山)은 마주치고 있으며 한내 건너 산밑으로 있는 촌락으로 동문(東門) 마을에 속하며 옛날 금강이 있었다 함.

김현령치(金縣令峙)

현종(顯宗) 5年(1664) 거제현아(巨濟縣衙)를 서부면(西部面)으로 옮겼으나 신구읍(新舊邑) 사이에 왕래가 많아 계룡산(鷄龍山)의 고자산치(姑子山峙)가 너무 가팔라 서문(西門) 고개에서 계룡산(鷄龍山) 중허리를 북서(北書)쪽으로 가로질러 열 마지기 골짜기를 지나 화원(花垣) 마을로 통하는 길이 8㎞ 폭 2m의 신작로(新作路)를 숙종(肅宗) 14年(1688) 거제현령(巨濟縣令) 김대기(金大器)가 개설하자 과도한 부역과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현장을 안렴사(按領使)가 책하여 현령을 파직시켰으니 방언이 김실령재라 하고 훗날 서문(西門)고개에 김현령치비(金縣令峙碑)가 건립 보존되고 있다.

김대기(金大器)가 신읍(新邑)과 구읍(舊邑)사이의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계룡산(鷄龍山) 중허리에 신작로를 개설하다 강제부역으로 파직되자 백성들이 이 길을 완성하고 김실령재라 부르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성김씨(義城金氏) 후손 김계윤(金季潤)이 1930年 서문(西門) 고개에 비석을 세웠다.

문절사(文節祠)

거제반씨(巨濟潘氏) 시조 반부(潘阜)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반중인(潘仲仁) 반중경(潘仲慶)을 봉사하는 사우를 반씨재실이라 하며 서문(西門)마을 도론곡(道論谷)의 거제공설운동장(巨濟公設運動場) 북쪽에 있다.

면사(面舍)번득

계룡산(鷄龍山) 밑 남문(南門)마을에 일운면 사무소(一運面 事務所)가 있던 곳이므로 1889年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인(日本人) 입주가 급증하자 1928년 지세포(知世浦)로 옮겼으며 현재는 구거제종고가 있다.

부처바위

계룡산(鷄龍山) 굴바위의 동북쪽에 있는 바윗굴에 옛날 중이 피난와서 돌 부처를 모시고 있었다함.

북문터(北門터)

서문(書門)의 동북쪽에 고현성(古縣城)의 북문이 있었으며 일명 시구문거리라 하여 죽은 사람의 시체가 나가는 곳으로 현재는 동문(東門)터라 하고 있다.

서당(書堂)때기

서문(西門)의 남쪽에 옛날 서당(書堂)이 있었다는 논이다.

선창(船艙)가 마을

서문(西門)의 북쪽 고현만(古縣灣)의 선착장이 있었고 여객선과 어선들이 드나들고 하였으나 현재는 매립되어 바다와 멀어졌다.

옥안때기

서문(西門)의 남쪽 계룡산(鷄龍山)밑에 있는 논으로 거제읍성(巨濟邑城)때 감옥이 있던 곳이다.

UN군(군) 거제도 포로수용소(巨濟島 捕虜收容소)

1950年 6.25 사변으로 11月 27日 공산군의 포로를 수용하기 위하여 고현지역(古縣地域) 360만평(萬坪)에 UN군(軍)이 수용소(收容所)를 설치하여 북한 인민군(人民軍) 15만고 중공군(中共軍) 2만, 의용군(義勇軍) 3천 모두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는데 반공포로를 분류하여 육지의 7개 수용소에 28,278명을 옮겼다가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이 1953年 6月 18日 0시에 27,389명을 석방하였다.
1953年 7月 29日 휴전에 따라 철수하였으며 현재 유적이 18동 잔존하고 임시유적관을 건립하여 산교육장으로 관람시키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일한 UN군의 유적이므로 보존사업으로서 복원하고 있다.

의상대(義相臺)

계룡산(鷄龍山) 꼭대기에 있는 절터로 신라(新羅)때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수도(修道)하던 곳이며, 돌담, 샘, 대밭이 있다.

장기(將棋)바위

의상대(義相臺) 북쪽에 있는 큰 바위에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장기(將棋)를 두었다하며 바위에 장기판 모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찰떡배미

서문(西門) 서쪽 도론골에 있는 논으로 고종(高宗) 22年(1886) 을유년(乙酉年) 흉년에 찰떡 한가래와 바꾸어 연명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죽바위

장기바위 서쪽에 공중을 돌리는 죽방울 모양의 둥근바위다.

탕건바위

남문(南門) 남쪽 계룡산(鷄龍山)에 탕건(宕巾)모양의 바위가 있다.

지석홈골

남문(男門)과 상동(上東)사이의 골짜기에 큰 돌을 쌓고 그 위에 홈통를 얹어 논물을 끌어온 곳이다.

담당부서

  • 문화관광국 문화예술과  

최종수정일 :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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